전남 영암의 빈센 본사 2공장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박용 수소연료전지 시연회’가 있는 날이다. 공장 왼편 길이 30m의 테스트 수조에 물이 가득하다.
대불산단을 가로지른 바람이 에포크(Epoch) 전기추진 보트를 흔들고 지나간다. 배를 들어 옮기는 갠트리 크레인 뒤로 ‘연료전지실증센터’ 간판이 보인다.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다.
빈센은 그동안 100kW, 250kW 연료전지시스템을 개발해왔다. 100kW 시스템에 수소를 불어넣자 모니터 운전반의 전압 수치가 600V 이상으로 오른다. 소음은 거의 없다. 베란다에서 가스보일러가 도는 정도의 진동이 전해진다.
100kW 연료전지는 하이드로제니아 같은 소형 수소전기보트를 움직이는 데 쓴다. 빈센은 150kW 스택 두 개를 붙여 만든 250kW급 연료전지시스템도 함께 개발하고 있다. 캐비닛 형태로 연결해 메가와트(MW) 단위로 용량을 키울 수 있다. 250kW 연료전지시스템 8개를 연결하면 2MW, 12개를 연결하면 3MW가 되는 식이다.
60kW, 150kW 스택이 기본
“100kW 스택은 60kW 스택 두 개를 붙여서 갑니다. 넥쏘용 연료전지 스택 두 개를 직렬로 연결했다고 할 수 있죠. 250kW 스택은 150kW 스택 두 개를 붙여서 가요. 그러니까 60kW 스택, 150kW 스택이 기본입니다.”
빈센은 국내 파트너사와 손을 잡고 2년 전부터 연료전지시스템을 개발해왔다. 유상연 부장(연료전지시스템부서장)이 100kW 연료전지시스템의 작동 현황을 담은 모니터 앞에서 말을 잇는다.
“해상용 PEM(고분자전해질) 연료전지 모듈은 크게 스택과 BOP라 부르는 주변장치로 구성이 돼요. BOP에는 막가습기, 수소공급장치, 공기공급장치, 냉각장치 같은 것들이 포함되죠. 100kW, 250kW 연료전지 모듈 모두 KR(한국선급)에서 AIP(Approval In Principle, 기본승인)를 받았고, 현재 형식승인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연료전지 인증은 기본이 되는 60kW, 150kW 스택을 대상으로 한다. 국내에 150kW가 넘는 스택 평가장비를 갖춘 곳은 손에 꼽는다. 빈센의 연료전지실증센터에 바로 이 장비가 들어와 있다.
“앞에 있는 장비가 20kW 스택 평가장비, 안쪽에 있는 장비가 150kW 스택을 평가하는 장비예요. 공장 앞에 있는 튜브트레일러에서 배관으로 수소를 받아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죠. 100kW, 250kW 연료전지 모듈과 스택 평가장비에서 나온 출력은 총 800kW 전자부하기로 보내 평가와 시운전을 진행합니다.”
이때 나온 전력은 본사에서 사용한다.
250kW 모듈을 연결해 MW 단위로 구성한 다음 테스트를 진행하는 시설도 갖추고 있다. 향후 연료전지 1MW, 배터리 500kWh, 로드뱅크(1.8MW)를 고압 배전반에 구성해 대형선박에 적용할 연료전지시스템을 모사하는 실증에 나설 계획이다.
“연료전지시스템은 스택, 전력설비(시스템)로 나눠서 인증을 받아요. 60kW는 2025년 상반기, 150kW는 2025년 하반기에 인증을 받는 걸 목표로 하고 있죠.”
연료전지시스템 개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 전문인력, 연구시설 등 삼박자가 잘 맞아야 한다. 또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파트너사의 역량도 매우 중요하다.
귀금속 촉매가 들어가는 60kW 스택 하나를 만드는 데 미니 해치백 한 대 값이 든다. 여기에 주변장치를 붙여 시스템을 꾸리고 이를 제어하는 운영 프로그램을 짜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
“선박에 들어가는 해상용 PEM 연료전지시스템을 처음 만들다 보니 아무래도 부담이 됩니다. 규정이나 기준이 없는 백지상태에서 모든 걸 하나하나 정리해서 만들어가는 일이 가장 힘들어요. 다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이걸 우리 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차량과 선박은 엄연히 다르다. 현대차에서 개발한 차량용 연료전지로는 선급에서 요구하는 까다로운 규정을 맞출 수 없다. 차라리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스타트업이 선박용 연료전지시스템 개발에 뛰어드는 데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빈센은 넥쏘용 연료전지시스템 2기를 연결해 100kW급 시스템을 테스트했다. 하지만 이대로 배에 넣어 배터리와 전기모터를 물릴 순 없다.
“선박용 연료전지는 인증이 훨씬 까다로워요. 혹시 모를 화재나 폭발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요구하죠. 수소가 폭발성 가스라 방폭 장비를 쓰는 건 상식입니다. 스택이나 수소공급장치, 재순환 펌프 등에 환기 설비를 마련하거나 질소를 채워 화재 요인을 없애야 하죠. 자동차 같은 경우 냉각에 방열판을 쓰지만, 선박은 해수를 써서 열을 식혀요. 이런 부분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선급은 안전과 관련해서 세세한 부분에 대한 기술 자료를 요구한다. 연료전지 핵심기술 공개를 꺼리는 자동차 제조사에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까운 시간이 마냥 흘렀고 다른 선택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빈센이 연료전지시스템 개발이라는 정면돌파 카드를 꺼내든 이유다.
싱가포르 쉘에 연료전지시스템 공급
빈센은 지난 2022년 세계적인 정유회사인 쉘(Shell)과 수소연료전지 공급 계약을 맺었다. 쉘 싱가포르는 정유설비가 있는 부콤 섬과 싱가포르 본섬을 오가는 로로(Ro-Ro)선에 적용할 연료전지시스템을 요청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쉘 싱가포르 외에도 싱가포르 조선·해양 플랜트 전문기업인 시트리움(Seatrium), 선박의 소유자이자 운영사인 펭귄 인터내셔널, 수소 공급사인 에어리퀴드 싱가포르가 함께했다.
여기서 빈센은 연료전지 기반의 보조동력장치 개발이라는 핵심 업무를 맡았다. 현대차의 60kW급 연료전지 모듈을 기반으로 선박에서 요구하는 안전 규정에 맞춰 공기압축기, 냉각수 펌프 등을 조정해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싱가포르의 쉘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석희 부장(동력시스템부서장)은 “사실상 스택을 뺀 시스템 자체를 새로 개발해야 했다”고 한다.
“팬을 달아 환기하는 식으로 수소 농도를 낮춰 폭발에 대한 위험을 회피하고 방폭센서, 제어시스템, 쿨러 등을 하나의 유닛으로 만들어 추가했어요. 또 연료전지에서 나온 직류를 교류로 바꾸는 전력변환장치인 ICM(Integrated Converter Module)을 따로 제작했고, 여기에 리튬이온배터리를 세트로 붙여서 갔어요. 처음 예상보다 일이 커졌지만, 이 과정에서 배운 게 많습니다.”
빈센은 2023년 12월 선박용 연료전지 모듈을 싱가포르로 납품했다.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펭귄 터내서티(Penguin Tenacity) 호에 설치하고 시험 운용에 들어갔다. 에어리퀴드가 튜브트레일러 카트리지를 일주일에 한 번 교체하는 식으로 수소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빈센은 이 과정을 거쳐 프랑스선급(Bureau Veritas)의 안전·성능 시험을 통과했다. 1년 반 동안 20명의 엔지니어를 투입해 뷰로베리타스의 증명서를 받아낸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빈센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빈센의 이칠환 대표는 선박용 수소연료전지 시연회를 앞두고 열린 브리핑 자리에서 “처음에 전기추진 보트를 만들면서 배터리 1.5톤을 실었는데 1시간 정도 운행했다. 이때 경험으로 배터리는 안되는구나, 연료전지로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 대표는 PEM 연료전지가 선박과 잘 맞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선박은 차량과 운전조건이 다르다. 급출발이나 급정거 없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방식이라 연료전지의 운전조건에 잘맞는다. 또 바로 출력을 내는 기동성을 요하는 소형선박에는 PEM 연료전지를 쓸 수밖에 없다.
“배터리, 연료전지, 조선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나라가 한국입니다. 연료전지 선박을 잘 만들 수밖에 없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죠. 연료전지는 선박의 메인엔진을 대체할 수있어요. 5년에서 10년 후에 연료전지가 대중화하는 시점에 이 연료전지를 유럽에서 수입하는 일만큼은 막아야죠. 국내에 연료전지 파워팩 기술을 갖춘 업체가 하나쯤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선박엔진 부문에서는 만, 바르질라 같은 유럽 업체가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쉽게 뚫을 수 없는 이 시장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선박용 연료전지 시장의 전망은 밝다. HD한국조선해양도 연료전지 전문 자회사인 HD하이드로젠을 세우고 SOFC(고체산화물 연료전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에스토니아 기업인 엘코젠(Elcogen)에 투자해 스택을 확보했고, 시스템 기술은 핀란드의 컨비온(Convion)을 인수하면서 해결했다.
이칠환 대표는 “SOFC는 LNG, 메탄올 등 운반선의 특성에 맞게 연료를 다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해상 환경에서 돌려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17m급 수소선박 올여름에 공개 예정
빈센이 개발한 100kW 연료전지시스템은 스택, BOP로 딱 나뉜다. 현대차 넥쏘가 양산되면서 국내에 연료전지시스템 관련 밸류체인이 잘 구축됐다. 이를 통해 막가습기, 공기공급 필터 같은 기성품을 조달해 적용했다.
다만 스택의 손상을 막기 위해 염분이 섞인 습기를 걸러주는 염분제거 필터가 별도로 필요하다. 또 공기를 불어넣는 공기압축기의 경우 용량이 맞지 않아 별도 제작이 요구된다.
2단 캐비닛 형태로 만든 250kW 연료전지시스템 시작품도 현장에 놓여 있지만, 100% 완성 상태는 아니다. 150kW 스택의 절반에 해당하는 75kW 스택을 BOP에 물려 운전을 할 수 있게 해놨다.
빈센은 전라남도와 영암군의 지원을 받아 17m급 레저선박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100kW급 연료전지 모듈 2기가 탑재된다. 오는 6월에 선박의 건조가 완료되면 연료전지 모듈을 탑재해 대중에 공개할 예정이다. 그전에 연료전지시스템 인증을 마친다는 계획이다.
빈센이 소형선박을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중은 연료전지시스템이 아니라 연료전지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모빌리티’에 관심이 있다. 대중의 관심, 그 화제성을 잡기 위해서라도 ‘멋진 배’가 필요하다. 선박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수소공급은 이동식 패키지 충전소로 해결할 예정이다.
수소연료전지에는 기본적으로 배터리가 함께 붙는다. 순간적으로 출력을 높일 때 배터리에서 전력을 끌어 쓰기 위함이다. 빈센은 배터리 평가실, 전기모터 운영 평가실을 따로 갖추고 있다.
기본적으로 92kWh 리튬이온배터리를 사용하고, 여기에 LFP 배터리(100kWh), 안전성을 높인 액침냉각형 리튬이온배터리(125.8kWh)를 함께 개발하고 있다. 액침냉각형은 배터리를 비전도성 액체에 담가 배터리 열폭주 화재 발생 시 질식·냉각 기능이 동시에 작용하도록 한 제품으로 화재 예방, 진압에 이점이 있다.
빈센은 친환경 선박 개발을 위해 인도의 힌두스탄 조선소(Hindustan Shipyard Limited, 이하 HSL)와 손을 잡았다. 올해 초 계약이 확정되면 배터리 전기추진 예인선을 먼저 개발하고, 이후에 수소연료전지를 적용한 하이브리드 선박을 개발하게 된다.
HSL은 빠른 충전, 긴 수명, 안전성을 두루 갖춘 차세대 LTO(리튬티타네이트산화물) 배터리 도입을 원한다. 빈센은 이 요구에 맞춰 LTO 배터리 기술을 보유한 도시바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국제해사기구의 해상 환경 규제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2023년 기존 선박에 EEXI(Energy Efficiency Existing Ship Index, 에너지효율지수)를 도입해 탄소배출 저감을 유도하고 있고, 이를 충족하지 못한 선박을 시장에서 퇴출하고 있다.
발전기 엔진을 써서 전기모터를 구동하는 DFDE(Dual Fuel Diesel Electric, 이중연료 디젤-전기 추진시스템) 선박의 경우 엔진 하나를 연료전지나 배터리 조합으로 대체해서 이 조건을 맞춰야 한다.
이때 엔진 하나를 교체하려면 2MW급 연료전지시스템이 필요하다. 빈센이 레트로피트(Retrofit, 개조) 시장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HD현대중공업의 1.8MW급 힘센엔진 무게가 31톤입니다. 그에 반해 2MW 연료전지시스템은 14톤에 불과하죠. 연료전지 모듈은 크기가 훨씬 작고 효율도 높아요. 연료전지가 비싸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물량을 확보해서 양산체제로 가면 소재, 부품 가격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어요. 현대차가 바로 여기에 들죠. 연료전지가 대중화되면 엔진 가격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빈센은 국내 조선사 한 곳과 손을 잡고 11만5,000톤급 운반선에 15MW급 연료전지 추진 파워를 적용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이 되는 60kW, 150kW 연료전지시스템의 인증부터 완료해야 한다. 또 연료전지시스템의 내구성을 검증하면서 양산 준비를 차근차근 밟아가야 한다. 스타트업이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지만, 피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액화수소운반선 개발이 막 시작됐다. 여기에 PEM 연료전지를 적용하면 최적의 운전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액화수소와 연계한 초전도 모터 개발이라는 미래 기술에도 관심이 간다. 눈앞의 이익만 쫓아선 안 된다.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같은 신기술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미래 시장의 주도권을 영영 놓치게 된다. 이런 일이 수소산업에도 일어날 수 있다.
빈센은 해운업계의 환경 규제에 맞춰 기술 변화의 흐름을 이끄는 선두에 있다. 그 저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더 큰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연료전지 선박과 관련해 국내에서 더 많은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으면 한다.